독립군 우당 이회영 선생을 만나다!
 
- 들어가며 

 
 여러분! 통일이 언제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그 기간이 빠를수록 좋겠지만,
구체적으로 날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때 나라가 1945년 8월 15일에
독립될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제 5년뒤면 독립되니까 조금만 더 버티고 힘내자!’,
‘아 드디어 내년에 독립이 되는구나! 1년만 버텨야지~’ 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예. 여러분이 지금 통일에 대한 막연한 생각과 같이
독립군 역시 독립에 대한열망만 있을 뿐, 정확한 날짜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으로
목숨을 바쳐 항전했기 때문에 독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은 독립군 중 한 명인 우당 이회영 선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알고 계시는 분들도 여럿 계시죠? ^^)


 
 


 여러분! 우리나라 대표 부자 하면 S그룹, H그룹 등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돈이 다 내 것이었으면... T-T)
 
그렇다면 조선시대 부자들은 누가 있었고, 규모가 어땠을까요?
오늘 이야기할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우당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9대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입니다.
지금으로 봤을 때는 9대가 국무총리, 국회의원, 장관, 대법관이 되겠지요?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자마자 조선의 귀족, 명문대가, 사대부를 포함한
지배계층이 일제히 일본에 귀속되었음을 찬동하고,
그들이 일제를 적극 지지하였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일제가 이런 악선전을 하는데
부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ㅡㅡ;
왜냐하면 조선 말의 돈 많은 부자들과 권력자들 대부분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일제가 수여하는 작위를 받았고,
이에 빌붙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당시 부자였다면 어떻게 했었을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일제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만큼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경받는 것입니다.)
 
 

 

 (친일파와 일제의 만행입니다...)
 
 그러나 우당 선생의 가문만을 달랐습니다. 우당선생은,

 “ 우리 가문은 대대로 조선시대 중추적 충신을 배출했다.
대과급제를 한 이가 170명, 정승 8명, 대제학이 3명,
임진왜란때는 국방과 외교에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도,
일선에서 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모두 우리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이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위기에 처했는데
비굴하게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가문의 전통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


 라고 말하며, 고난의 항일전선에 몸을 바쳤습니다.
 
 우당 선생은 조선이 무너지자 즉각 토지 등 전재산 40만원
(현재 가치 600억원에 달합니다!)을 청산합니다.
또한 선생의 식솔 역시 전 재산을 급하게 청산하여 40만원을 준비합니다.
(제 값을 받았다면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지만, 현재 가치 2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당 선생과 그 가족들은 전 재산으로 독립자금을 준비한 뒤
만주로 떠나는 길에 노비 문서를 소각하여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따라올 사람은 평등하게 받아주었습니다. 


선생은 준비한 자금으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훈련시켰습니다.

학교를 세운 이유는 


“ 조선시대 내내 문관우위의 정신이 나중에는 무관천시의 결과를 낳았고
이 때문에 율곡선생의 10만양병설이 무시당하여 결국 임란의 화를 입은 것이다.


-중략-

독립운동은 먼저 학문과 지식을 넓혀서 국제정세와
과학의 발전을 인식함과 동시에 체력을 키우고 개척정신을 가다듬어
고난의 항일투쟁에 굴하지 않는 강건한 육체와 정신을 키워야 한다. “ 

 
라고 말하며 뜻을 밝혔습니다. 
 
 독립군의 의복과 음식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 직접 바느질을 하고,
밥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명가이자 부자였던 마나님께서
노비들의 옷과 음식을 대령했다고 하니,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선생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은 그 후 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역시 모두 이 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그 후 광복군 태동의 기초가 됩니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선생은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잠입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죠......


고종의 망명 계획 실패 이후, 선생 일가는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됩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기가 일쑤였으며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할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가 독립자금으로 돈을 다 쓰고 밥을 굶는다는 사실. 믿겨지십니까? 


선생은 그 후,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동지들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사건을 목도한 선생은 일제에 대항하여 마지막 여생을 바침으로써 정세를 역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이제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 남은 것은 동지들에게 이 늙은이도 항일전선에서 끝까지 싸웠다고 알리고 싶다. ”

선생은 이렇게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허름한 중국 옷
(현재 독립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견학가서 보세요!)으로
가장하여 상해부두에서 배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배 안에서 친일파의 폭로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이역 땅에서 추위에 배고픔, 고문의 고통에 고생하다가 옥사하고 맙니다.
선생의 나이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였습니다.

선생의 6형제 중 5명 역시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타국의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또한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성재 이시영만 유일하게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 다시한번 생각해봅시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 선생의 일가를 보며, 현재 편안한 삶을 영위하며 국가안보,
통일에 나몰라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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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양이 2011.11.02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진자가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게 참 대단한것 같아요.
    요즘 하도 각박한 세상이라 그런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ㅋㅋ
    매번 역사이야기 잘 보구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