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언니 방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며가며 듣던 노래의 멜로디를 어느새 나도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꼬마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의 절반은 충분히 가리는 커다란 안경을 쓴 앳된 얼굴 위로 『BC 603』이라는 타이틀이 박혀 있던 1989년에 발매된 1집 앨범, 언니방 한 켠에 놓여있던 그 음반을 통해 이승환과 그의 노래를 만났다.

2009년, 어느새 그가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나는 아직도 방문 너머 들려오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던 그때의 꼬맹이 같은데 벌써 그의 노래를 들어온 세월이 20년이나 되었다니!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동안 나와 함께 했던 그의 노래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시간이 그냥 흐른 건 아닌 모양이다. 하나의 노래에 몇 가지 추억이 굴비처럼 엮여 함께 떠오르니 말이다.

이승환의 음악인생 20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이 나왔다. 이름하여 『환타스틱 프렌즈(Hwantastic Friends)』, 이승환과 그의 '프렌즈'가 함께 내놓은 재기발랄한 프로젝트 앨범으로, 말하자면 '헌정 앨범'인 셈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동안과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의 어우러짐이 놀라움을 자아내는 것처럼,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선보이는 이승환에게 헌정 앨범이라는 단어의 조합 역시 어딘가 조금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20년 동안 자신만의 음악을 해온 그에 대한 기분좋은 낯섦이지만 말이다.

이번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한 '프렌즈'의 면면은 얼핏봐도 장난이 아니다. 평소 이승환과 친한 유희열을 비롯해 타이거JK, 윤도현, 김종완(넬), 윤건, MC스나이퍼, 아웃사이더, 알렉스, 호란, 이하늘, 윈디시티, 조권(2AM) 등등 쟁쟁한 실력파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세대는 물론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그의 '프렌즈'의 이름을 보며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사랑받아 온 이승환의 명곡들이 그들의 손을 거쳐 어떻게 재탄생할지 저절로 기대가 됐다.

이승환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앨범인 『환타스틱 프렌즈』에는 모두 10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승환이 부른 신곡 2곡과 후배 뮤지션들이 다양한 장르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입혀 재탄생시킨 리메이크곡 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솔직히 음반을 듣기 전까지는 리메이크 해봐야 기존의 곡과 얼마나 달라질까 싶었다. 그런데 웬걸,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편곡을 달리해 곡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는가 하면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내용의 랩이 첨가되고 완전히 다른 가사가 덧입혀진 노래도 있었다. 보컬 목소리의 느낌이 다른 건 기본이다.

그런데 생각외로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기존곡에 대한 애정이 두터운 만큼 리메이크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커질 수도 있는데, 이번 앨범의 경우 예상을 뛰어넘는 변형이라 그런지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노래를 듣는 것 같으면서도 순간순간 기존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물론 이승환만의 그 감성을 제대로 살려내거나 이어가지 못한 게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익숙함과 낯설음의 절묘한 어우러짐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제각각 자신들의 방식과 성향으로 리메이크된 노래에는 참여한 뮤지션들의 개성이 한껏 묻어난다. 예전에 좋아했었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은 클래지콰이의 목소리로 더욱 달콤해졌고, 신나는 리듬의 '체념을 위한 미련'은 가장 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했음에도 유독 윤건의 부드러운 목소리만 귀에 와닿았다. 나중에 앨범을 찾아보니 그 목소리 뒤에는 이하늘, 타이거JK, Sean2Slow, Verbal Jint, 45RPM의 J-Kwondo 등이 버티고 있더라는. 윤건의 목시리에 중독돼 미처 그들을 듣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랩이나 락, 다채로운 보컬이 더해져 다른 느낌으로 불려진 '심장병'과 '붉은낙타', 특유의 주문을 빼고는 새로운 가사로 갈아입어 같은 듯 다른 곡으로 탄생한 '덩크슛' 등은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만, 그것 역시 익숙함 속의 색다른 맛이었다. 째즈그룹 윈터플레이의 손이 닿은 '텅 빈 마음'은 째즈풍으로 새롭게 거듭났고, 윈터시티가 부른 '크리스마스에는'은 레게풍으로 변신해 원곡보다 더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리메이크곡들 중 원곡의 감성을 잘 살려낸 곡을 꼽으라면 단연 유희열이 선곡해 편곡한 '내가 바라는 나'가 아닐까 싶다. 이승환과 함께 한 세월 만큼 서로를 잘 아는 데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런지. 이승환 자신도 그곡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니 역시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나보다. 김종완(넬)의 목소리도 잘 어울린다(참고로, 유희열도 보컬에 참여했다!). 그외 서우가 피처링한 이승환의 신곡 'My Fair Lady'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이승환표 발라드다.

이승환과 친구들이 모여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뿜어내는 곡들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입가에 가장 맴도는 곡으로는 이승환의 신곡인 '좋은날Ⅱ'을 꼽고 싶다. 익숙하고 편안한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사들이, 반복되어 나오는 '난 오늘 하루 실컷 먹고 잘거야. (Wonderful Day) 열심히 살은 갸륵한 내게 주는 선물이야~♪'라는 노랫말이, 그 순간 지치고 상한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 같아 계속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어깨도 조금씩 들썩거려 주면서. 짧은 노랫말 한 줄이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위로가 되어줄 때도 있는 법이다.

이번 '20주년 앨범'은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앨범 자켓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진공비닐포장을 벗기면 이승환 20주년 앨범임을 밝히는 영문자가 박힌 A4 크기의 하드보드지가 등장한다. 그걸 중심으로 앞에는 그간의 이승환의 모습이 담긴 화보와 노랫말이, 뒷면에는 수록곡과 각각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아래에는 이번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빼곡한 사진을 두른 음반이 꽂혀있다. 외부 충격을 막아줄 그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달랑 CD만 하드보드지에 붙어 있다. 물론 시디케이스도 없다.

시디는 시디케이스에 담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던 홍보 문구는, 그러니깐 시디케이스 자체가 아예 없다는 말이었다. 발상 자체는 신선하지만, 그때문에 음반을 구입한 이들은 긴 한숨을 내쉬게 된다. 결국 별도로 장만한 시디케이스에 음반을 옮겨 보관하고 있다. 파격적인 앨범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도 좋지만, 음반을 제대로 보호해 줄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는 것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다음에는 파격적이면서도 시디 보관까지 고려해준 그런 앨범 케이스를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

앨범 케이스는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음악들은 모두 좋았다. 며칠 째 계속 이 음반을 듣고 있다. 하나가 꽂히면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버릇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질적인 듯하면서도 적절하게 제자리를 잡아가며 즐거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음악의 향연이 내 귀는 물론 내 마음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승환의 음악들과 함께 했던 내 지난날의 소중한 추억들을 하나둘 다시 되새김하는 즐거움과 함께 말이다.

영원한 '어린왕자'였던 이승환이 어느새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그도 어느새 40대 중반의 중견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환은 아직도 달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보다 즐거운 음악을 위해 여전히 고민한다. 지난 20년 동안 오롯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과 함께 해 온 그이기에, 앞으로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멋진 음악과 함께 우리를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래서 50대가 되어도,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음악을 위해 달리는 멋진 뮤지션 이승환으로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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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falconsketch.tistory.com BlogIcon 팰콘스케치 2009.12.08 0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벌써 20주년이군요~!
    놀라워요~!

  2. 손마왕 2010.01.08 0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라이브의 황제라 불리던 이승환....
    최근 모 프로그램에 출연했던데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최강동안을 자랑하더군요.
    방송국 음향시스템을 믿지 않아서 밴드와 함께 움직인다던 말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개인적으로 노래 정말 잘한다고 생각합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