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영화 보러 갈래요?
- 무슨 영화?
- 왜 요즘 티비에 김영애가 영화 찍었다고 방송 나오잖아, 그 영화요.
- 그래. 김영애 영화 찍었다고 요즘 자주 나오더라.무슨 내용인데?
- 엄마랑 딸 이야기인데, 엄마가 봐도 지겹지 않고 재밌을 것 같아서. 영화표가 생겼거든.
- 그래. 보러 가지 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에게 슬며시 영화 이야기를 던졌다. 즐겨보시는 아침 프로그램에서 최신 연예 정보들도 간간이 접하시는 엄마에게 중견배우 김영애를 거론하며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고 조금 힘주어 설명했더니 의외로 금세 수락하신다. 영화관에 가자면 귀찮다며 손을 내저으시던 엄마가 몇년 전 사박사박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영화관이 들어선 이후 영화 보기에 대해 한층 관대해지셨다. 그렇게 엄마랑 단둘이 영화 〈애자〉를 보러 영화관 나들이를 했다.

예전에 우연히 무슨 영화 잡지에서 우연히 〈애자〉 촬영 현장을 담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오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온 애자가 엄마 영희와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다가 언쟁을 벌이는 장면과 애자의 남자친구가 엄마가 처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씬의 촬영에 대한 현장 스케치였다.

그 기사를 통해 〈애자〉라는 영화를 처음 알게 됐다. 다소 촌스러운 제목임에도 평소 좋아하는 배우인 최강희와 김영애가 투톱으로 출연한다는 것과 영화가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올가을 개봉을 목표로 촬영중이라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개봉하면 잊지않고 챙겨보리라 몰래 찜을 해두었다.

어느새 9월, 그새 촬영과 후반작업까지 끝낸 영화 〈애자〉가 개봉을 했다. 개봉전 시사회평이 호의적이라 더욱 기대가 됐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인 만큼 엄마랑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흔쾌히 수락한 엄마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영화 속 또다른 모녀 커플의 이야기를 방문했다.

담배, 소주, 싸움박질의 문제아 3종 세트에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우등생의 면모까지 겸비한 피끓는 열아홉의 청춘 박애자. 각종 백일장 수상 경력에 빛나는 글솜씨를 가진 그녀는 소설가의 꿈을 품은 채 상경한다. 그러나 그녀 나이 어느새 스물아홉, 골목에서 삥 뜯는 고삐리와 맞짱뜨며 유치장에 갇히는 똘끼는 여전히 충만하지만 자신만만하던 열아홉과 달리 삶은 고단하다. 변변하게 내세울만한 작품 하나 없는 이름없는 소설가에 만나는 남자친구는 바람둥이다. 인생은 갑갑하지만 우리의 박애자, 여전히 씩씩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무서울 것 없는 애자에게도 강적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엄마 영희다. 뛰는 애자 위에 나는 영희 있다고, 엄마 영희는 야생마처럼 날뛰는 애자를 자신의 필살기인 공포의 뒷덜미 잡기 신공으로 단박에 제압하는 내공을 선보인다. 과연 그 엄마에 그 딸이다. 자신의 실수로 다리를 다친 아들 민석을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미안함을 만회하려고 하는 영희와 늘 오빠만 위하고 자신은 뒷전인 엄마가 못마땅한 애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오랜만에 부산집을 찾은 애자는 오빠의 결혼식에 회심의 깜짝 이벤트를 펼치며 결혼식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 대가로 또다시 엄마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안방으로 끌려 들어간다. 언제나 그렇듯 모녀의 대화는 말다툼으로 끝이 나고 애자는 문을 박차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며칠 후 걸려온 엄마의 전화. 또 무슨 잔소리를 할까 귀찮은 생각에 안 받으려다 받았던 그 전화 너머엔 숨이 끊어질 듯이 가느다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깜짝 놀란 애자는 바로 부산으로 향하고, 재발한 엄마의 병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애자와 영희 모녀의 동거가 다시 시작된다. 탐탁치 않은 대리소설과 엄마의 병간호를 동시에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애자와 돈 안 되는 글쓰기에 매달려 나이만 먹어가는 딸에게 어떻게든 짝을 만들어 주려는 엄마의 작전이 얽히면서 그들의 동거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징글징글한 모녀 사이에 켜켜이 스며있는 애정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녀 간의 장면들 중에 특히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온 애자와 영희 모녀가 갓 잡은 생선회와 소주 한 잔 들이키며 함께 웃던 장면, 잠깐 서울에 다니러 가는 딸에게 '빨리 와, 엄마 심심해'라고 쓴 엄마의 쪽지, 자신이 떠난 뒤에 홀로 남은 딸을 부탁하기 위해 딸의 남자친구를 찾아가던 엄마의 모습 등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마주 선 채 엄마도 살고 싶지 않냐고 간절하게 소리 지르던 애자와 나도 살고 싶다는 말을 힘겹게 토해내던 엄마 영희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꼭 껴안던 장면과 이만 보내달라는 엄마의 말에 눈물로 뒤범벅된 애자가 고개를 가로젓던 장면, 그리고 마지막 떠나는 길에 잠시 들른 엄마에게 애자가 귓속말로 살며시 속삭이던 장면이었다. 티격태격하던 모녀가 조금씩 내보이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은 스크린 밖 관객의 마음까지 따듯하게 보듬어 준다.

30대의 나이에도 교복이 어울리는 연예계 최강동안 최강희는 영화 〈애자〉를 통해 그전보다 한층 깊어지고 진해진 연기를 보여준다. 겉으로는 악과 깡으로 점철된 애자의 다혈질적인 면을 살리면서도 조금씩 짙어지는 여린 내면의 섬세함 또한 놓치지 않는다. 한결같은 애자의 돌아이적 기질을 표현하느라 가끔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애증의 관계인 엄마와 갈등하고 다시 화해하며 변화되는 애자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잘 살려냈다. 또한 절친인 개그맨 김숙의 도움으로 익혔다는 부산 사투리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연스러웠다.

청소년 드라마 〈나〉와 영화 〈여고괴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최강희는 일요드라마 〈단팥빵〉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개인적으로 최강희라는 배우를 눈여겨 보게 된 건 짧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영화 〈와니와 준하〉였다. 그후 영화 〈달콤살벌한 연인〉과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를 통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던 그녀가 오랜만에 영화 〈애자〉로 다시 스크린을 찾았다.

인터뷰를 통해 자신과는 전혀 닮지 않은 인물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애자를 통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는 그녀의 말처럼 영화 〈애자〉에서 최강희는 기존의 귀엽고 상큼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버럭녀 애자로 거듭났다. 고민이 컸던 만큼 연기도 더욱 농익었다. 그동안 최강희를 대표하던 동안, 4차원, 골수천사라는 이미지도 나쁘지 않지만,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노력하는 배우 최강희로 돌아온 것이 팬으로서 무척 반갑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애자〉는 최강희의 연기 인생에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제시해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 〈애자〉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또다른 반가운 얼굴은 중견배우 김영애다. 한때 사업상의 이유로 연기생활 은퇴를 선언해 아쉬움을 남겼던 그녀는 드라마 〈황진이〉의 임백무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며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영화 〈애자〉에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억척 엄마로 분했다.

오랜 연기 경력만큼이나 수많은 작품에 출연한 그녀인지라 손에 꼽을 작품들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나는 김영애 하면 드라마인 〈파도〉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살다 뒤늦게 만난 사랑과 재혼을 반대하는 자식들과의 갈등 사이에서 엄마 또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한 명의 여자라는 단순한 사실을 절절하게 표현한 그녀의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었다.

영화 〈애자〉에서도 그녀의 연기 내공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철딱서니 없는 딸을 가뿐히 제압하는 기센 엄마와 애끓는 모정으로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엄마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우리들의 엄마를 스크린에 풀어낸다. 그녀의 엄마를 통해 관객들은 짠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과연 김영애다.

그외 반듯한 이미지와 달리 애자의 바람둥이 남친으로 변신한 배수빈이나 영희의 친구와 병원의사로 등장한 성병숙과 최일화, 출판사 편집장의 장영남 등 조연들의 연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까메오로 깜짝 출연한 김C는 짧은 분량임에도 빵~ 터지는 큰 웃음을 선사하며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맞선남 김C에게 들려주는 애자의 시는 관객들이 함께 웃으며 읊을 정도로 아주 대박이었다.

정기훈 감독은 400쌍의 모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애자〉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에서 일상의 모습들이 묻어난다. 보통의 엄마와 딸 사이에 볼 수 있는 상황과 대화들이 펼쳐지고 생활 속에서 만날 법한 유머들이 등장한다. 만들어진 가식적인 상황과 인물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기에 관객들은 쉽게 공감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부산영상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의 최우수 선정작인 〈애자〉는 그만큼 탄탄한 시나리오를 자랑한다. 죽음을 앞둔 엄마와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다소 평이한 스토리이지만 개성있는 캐릭터와 섬세한 내면의 묘사, 설득력 있는 전개와 자연스러운 웃음 장치,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감동 등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함께 한 정기훈 감독은 〈애자〉를 통해 앞으로 주목해야 할 신인감독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은 대부분 언젠가는 엄마가 된다. 엄마와 딸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언제나 한 발자국 늦게 다가오듯 딸들이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늘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던 애자가 엄마를 사랑하는 자신의 진심을 깨닫기까지의 시간 또한 그렇다.

평생 곁에서 사사건건 간섭하며 잔소리를 할 것 같던, 온갖 투정과 짜증을 부려도 언제나 받아줄 것 같던 엄마를 너무 빨리 떠나보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린 애자는 뒤늦게 눈물을 쏟는다. 그 모습에 함께 울컥하게 되는 건 영화 속 애자에게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제목 〈애자〉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애자를 향한 영희의 마음을 나타나는 단어인 '愛子', 즉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뜻도 함께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딱서니 없는 애자가 영희에겐 더없이 사랑하는 딸(愛子)이듯이 말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엄마의 손을 꼬옥 잡았다. 거친 엄마의 손에서 전해오는 따듯한 온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그리고 그 보드랍고 강한 체온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언제나 가장 든든한 내 편이며 동시에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존재인 엄마, 영화 〈애자〉는 그런 엄마를 다시금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 속 애자를 통해 세상의 모든 딸들이 엄마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애자와 영희 모녀의 시끌벅적하면서도 가슴 짠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영화 〈애자〉는 탄탄한 시나리오에 배우들의 호연과 섬세한 연출이 어울어져 멋진 영화로 완성됐다. 가족 간의, 또는 모녀 사이의 사랑을 되새김하게 해주는 영화 〈애자〉를 핑계로 오랜만에 엄마와 영화관 데이트를 해보는 건 어떨까. 엄마와의 사이가 서먹한 상황이라면 더욱 강추다. 영화관을 나올 때쯤엔 저절로 엄마 손을 꼭잡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모자(母子) 간의 데이트도 대환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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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다음영화, 애자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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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애리 2009.09.20 0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강희가 처음으로 정통 멜로드라마에 도전한 <애자>로군요.
    이 영화로 '연기 사춘기' 통과했다는....걸 씨네21에서 보았더랬죠 ^^ㅋ

  2. Favicon of https://hwanyou.tistory.com BlogIcon 환유 2009.10.09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나리오가 탄탄하다는 생각 저도 했어요. 진부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데, 너무 심각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 않으면서 잘 만든 듯 해요